■ ‘쇼트폼 인문서’ 잇따라 출간
주제 세분화하고 분량도 줄여
취향·감성충족‘문고판’부활
현대사회 성찰 ‘배반 시리즈’
내년 상반기까지 20권 출간계획
미래세대 지식교양서 ‘굿모닝…’
내년부터 상·하반기 2권씩 공개“외모지상주의라는 아름다움의 독재와 전횡으로부터 벗어나길 희망한다.”(김종갑, ‘외모 강박’ 중에서)“나이 듦의 풍경은 ‘부정’과 ‘상실’의 어휘로만 수식할 수 없는, ‘모든 삶’ 그 자체다.”(최은주, ‘나이 듦’ 중에서)외모·동물·쇼핑·공정 등 2030 세대가 관심을 갖는 주제를 다룬 ‘실용 인문서’ 시리즈가 잇달아 출간되고 있다. 평균 독서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가운데 이들 시리즈는 150∼200쪽 안팎의 문고판 형태로 젊은 독자와 만나며 인문교양서 시장의 새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최근 은행나무는 건국대 몸문화연구소와 함께 ‘배반 인문학’ 시리즈를 선보였다. 배반 인문학은 ‘배신’하지 않는 ‘반려’ 인문학이라는 뜻으로 1차 출간에선 ‘외모 강박’ ‘나이 듦’ ‘취향’ 등 3권을 공개했다. 김종갑 건국대 영문과 교수가 쓴 ‘외모 강박’은 자기 몸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는 외모 불만족 사회를 성찰한다. 저자는 외모에 대한 지식 수준이 낮은 국가일수록 외모에 만족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한국인들은 미용·다이어트·성형 등에 대해 너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 앎이 병이 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그러면서 “공격적 에너지인 열등감이나 불만족이 나를 향하면 내가 지옥이 되고, 타자를 향하면 타자를 지옥으로 만든다”며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최은주 몸문화연구소 연구원의 ‘나이 듦’은 상실 또는 완숙함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만 노화를 바라보는 경향을 비판한다. ‘노년기’가 젊은 시절의 복잡한 갈등에서 벗어난 정서적 안정기만도, 어떤 기회도 다시 오지 않는 단절의 시간만도 아니라는 저자는 “나이 드는 순간순간이 살아 있음의 기호”라고 말한다. 은행나무는 일상 속 키워드로 인문학적 사유를 풀어내는 ‘쇼트폼 인문서’ 시리즈를 통해 내년 상반기까지 ‘혐오’ ‘비혼 반혼’ ‘1인 생활자’ 등 총 20권 이상을 내놓을 계획이다. 한재현 은행나무 편집자는 “간결한 키워드를 책 제목으로 내세운 것이 시리즈의 특징”이라며 “거대 담론보다는 구체적이고 세분화한 주제에 관심을 보이는 2030 독자들의 성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은행나무가 이처럼 장기 인문서 시리즈 기획에 나선 것은 앞서 나온 비슷한 형태의 문고판 시리즈들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사가 올해 3월 ‘아침에 시작해 저녁에 끝내는 지식 라이브러리’ 콘셉트로 5권을 먼저 선보인 ‘굿모닝 굿나잇’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한정된 인문서 시장에도 불구하고 최재천 교수의 ‘생태적 전환, 슬기로운 지구 생활을 위하여’는 3쇄(8000부)를, ‘어떻게 이상 국가를 만들까?’ ‘평등을 넘어 공정으로’ 등 나머지 4권은 모두 2쇄를 찍었다. 문고판 교양서를 처음 써봤다는 최 교수는 “깊게 파고들 만한 주제도 여러 키워드로 ‘토막’을 내고, 글도 단문으로 끊어 쓰게 되더라”며 “젊은 독자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의 발현이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번 책 이후 중·고등학교에서 특히 강연 요청이 많은 건 감각적 디자인을 갖춘 문고판 형식의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김영사는 올 하반기부터 내년까지 ‘AI와 인간의 미래’(장동선 뇌과학자), ‘금융 첫걸음’(홍춘욱 이코노미스트) 등의 책을 공개할 계획이다.
문학과지성사도 지난해 3월 이후 정치·사회·예술 에세이 등을 소개하는 인문 시리즈 ‘채석장’을 꾸준히 발간하고 있다. 그동안 선보인 5권 가운데 가장 호응이 높은 것은 3쇄를 찍은 ‘아카이브 취향’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가 쓴 이 책은 18세기 파리의 형사 사건을 기반으로 역사가가 느끼는 매혹과 불안을 담았다. 문학과지성사는 올 하반기에 장뤼크 고다르와 르네 마그리트의 대담집을 포함해 5권을 선보인다. 김현주 문학과지성사 인문팀장은 “내용은 좋은데 ‘단행본 분량’이 안 돼 출간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 젊은 독자들의 관심 덕분에 문고판이 부활하며 ‘쇼트폼’ 형태로 소화 가능한 외서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휴머니스트는 올해 3월부터 Z세대를 겨냥한 ‘곰곰문고’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현재까지 ‘동물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하다고요?’ ‘쇼핑의 미래는 누가 디자인할까?’ 등을 내놓았으며, 앞으로 진로교육·금융 등에 대한 책을 매년 15권씩 출간할 예정이다.
출판계에선 이 같은 ‘쇼트폼 인문서’ 트렌드를 ‘독자들의 지식수준 향상’이란 측면에서 분석하기도 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준(準) 전문가 수준의 인문서 독자들은 책을 통해 ‘지식’이 아닌 ‘감성’을 충족하려 한다”며 “이런 독자를 일종의 ‘세컨드 크리에이터’라고 여기는 출판사들이 지식을 일방적으로 하달하는 ‘벽돌책’보다는 대화하듯 취향을 공유하는 ‘문고판’을 선호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고 풀이했다.
나윤석, 외모·동물·公正… ‘MZ 세대’ 겨냥한 인문학이 대세, 문화일보, 2021.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