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가스 배출량과 이산화탄소 농도가 사상 최악을 기록하고 있다는 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고 있다. 실제 눈에 보일 정도로 미세먼지 내지 초미세먼지로 뒤덮인 대기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암울한 종말 시대와 흡사하다. 미세먼지뿐이랴. 폭염․ 폭설․ 폭우․ 가뭄 등의 현상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은 전 세계적으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오늘날의 기후변화는 더 이상 예측하기 어렵고, 인간이 적응하기 어려운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기후붕괴(global climate disruption)’의 문제이다.
근래 들어 '인류세'에 관한 논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인류세가 뭐예요? 인류가 내는 세금이에요?’ 이러한 물음은 기후변화의 파급력에 대한 웃지 못할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동시에 인류세라는 명칭이 대중에게까지 퍼져갈 만큼 인류세의 문제가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류세는 지질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이 이미 2000년에 인간이 가진 위력이 지구 시스템을 바꿔 놓았다는 목소리를 내면서 기존의 지질연대를 교체할 이름으로 내놓은 것이다. 우리는 계절마다 순환하는 기후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지구의 시스템 속으로 진입하였다. 불행히도 21세기에 들어서 인류조차 파멸에 이를지도 모르는, 결코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태에 직면했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인류세 시대의 행위자 <Agency at the Time of the Anthropocene〉에서 지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가만히 있어야 할 지구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있을 것 같았던 지구와 하늘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기우는 이제 공연한 걱정이 아니라 현실적인 고민이 되었다. 한 번이라도 이 이상한 ‘시대감’에 사로잡혀 봤다면 이 글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 그대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지구는 이제 없다.
인류세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용어를 사용해야 할 정도의 대규모적 지각변동이 지구에 있었다는, 파울 크뤼천의 주장에 모든 학자가 동의했던 것은 아니었다.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개인적 의견, 잠깐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박도, 그런 유행에 편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도 있었다.
인류세를 인정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시작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인류세의 시작을 산업혁명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의 급격한 증가를 시점으로 잡았던 크뤼천과 달리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농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류세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이견들을 조율하기 위해서, 영미권의 유명 지질학자들로 결성된 인류세 연구그룹AWG, Anthropocene Working Group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1950년을 인류세의 시점으로 공표하였다. 핵 실험으로 인한 방사선 물질, 플라스틱, 닭 뼈가 그것이다. 1945년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인류는 사상 처음으로 핵실험을 했던 해이다. 이때 연구 책임자인 존 오펜하이머 박사의 “나는 지구의 가장 큰 파괴자가 됐다”는 말은 지금도 인구에 자주 회자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서 1950년은 산업화가 가속화되는 시점이다. 심각한 대기오염과 이산화탄소의 급증, 플라스틱의 대량생산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이 닭 뼈이다. AWG의 대표격인 얀 잘라시에비 치 영국 레스터대학교 교수는 먼 훗날 현재의 지층에서는 닭 뼈 화석이 무더기로 발견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수천 곳의 쓰레기 매립지와 길모퉁이에서는 닭 뼈가 화석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연간 600억 마리의 닭이 소비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AWG 진단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가 있겠다.
도나 해러웨이와 같은 여성주의 철학자는 인류세라는 용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지구가 인간의 작품이라는 의미의 인류세는 인간이 가진 힘과 능력을 터무니없이 과대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인류는 지구의 지배자나 통치자가 아니라 지구의 생태계에 의존하면서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유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인간종이 어리석게도 자기 삶의 터전을 훼손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녀는 과거에 신화적으로 지구와 연관되었던 가이아(Gaia), 메두사(Medusa) 등과 같이 다양한 이름을 통칭하는 의미에서 쑬루세(Chthulucene)를 제안하였다.
이외에도 인류세라는 용어가 유럽이 져야 할 책임을 다른 아프리카나 아시아에도 떠넘기는 면죄부 역할을 한다고 비판하면서 나온 유럽세(Eurocene)나 ,빈부 차이, 대량생산, 소비 사회 등을 초래한 자본주의를 위기의 진원으로 지목하면서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를 내세운 자들도 있다.
지구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과학자들마다 내놓은 예측과 전망이 서로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류의 종말은 사이비종교의 종말론을 연상시키거나 ‘아니면 말고’ 식의 선정적 보도 기사를 양산해낸다. 우리는 인류세를 엄밀한 과학적 증거의 관점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실천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 문제는 칸트의 정언명제가 아니라 가언명제와 비슷하다. ‘만약 미래에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렇게 질문해야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윤리적인 선택과 결단을 요구한다.
유일한 길은 삶의 생태적 전환에 있다
현실적으로 인류세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미 익숙해진 삶의 패턴을 전환시키는 새로운 방식으로 지구를 사고해야 한다.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철학을 살펴보자. 자연을 인류와 공존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지배와 이용의 대상으로 보았다.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원론이 그러한 생각의 근저에 깔려 있다. 자연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우주관이 없었다면 근대 실험과학의 위대한 행보가 시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이처럼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바라보고 이런 사고가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끝없는 이윤 추구와 맞물려 돌아간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겠는가? 19세기 포경산업에서 보듯, 바다를 호령하는 저 아름답고 위엄 있는 동물 고래조차 기름과 뼈를 발라내어 이윤을 뽑아내는 아주 탁월한 돈벌이 사업 대상 정도로만 여겨질 뿐, 고래의 생명성 문제와 고래가 바다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위치 등의 문제는 사고영역에는 아예 들어올 틈이 없다.
지구의 위기는 근대적 상상력의 실패를 의미한다. 나무와 돌에게서 물질밖에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상상력의 실패이다. 나무와 돌이 있고 없음의 차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한 감성의 실패였다. 자신의 명령하는 목소리와 욕망에 취해서 자연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근대적 세계관의 중심에 는 그러한 실패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고 관계하는 방식, 우리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주 금요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를 앞두고 158개국 2천 4백여 도시에서 전 세계적으로 기후 변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망가져가는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 각계에서 어떤 노력을 벌이고 있는지 그 행보는 사실상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검색을 해야만 찾을 수 있는 정보들이며, 그것도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것에 그칠 때가 많다. 다시 말해, 환경이 결코 분리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 중대한 사건임을 충분히 알려준 데 비해 ‘무엇을, 어떻게’에 대한 구체성, 실천성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전면적으로 부상이 되지 않는다. 환경을 둘러싼 문제는 국가만의 일도 아니고, 전문가만의 일도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거론한 바 있듯이 개별적 죄책감에만 호소하는 방식을 멈추고 거대한 구조적 방안이 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을 포함한 사회적 차원의 정념(e-motion), 즉 정서적 연대를 통한 행동이 동반될 때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입장도 정립될 수 있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을 어떻게 수반되게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하나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비인간)을 나누고 인간이 아닌 것들을 걸러내는 인간중심적 휴머니즘의 '감산'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인류세를 맞이한 21세기 인류가 처한 문제들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인류세라 불리는 21세기,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고 재단하는 방식이 아닌, 인간과 비인간을 '가산'하는 사고방식이 생태적 전환의 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